VISUAL

2015.04.03 START 08:00 SUNDAY 국체보상운동기념공원 - 시내일원

  • 0
  • 3
  • 8

마라톤 역사마라톤 역사

  • HOME
  • 마라톤광장
  • 마라톤 역사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Darius, B.C. 558∼486) 왕은 그리스를 점령하기 위하여 전투함을 파견하였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제1차 그리스 원정) 그러나 그리스로 향한 기원전 492년페르시아함대는 중도에 뜻밖의 태풍을 만나 300척의 전투함이 전부 바다에 가라앉고, 2만여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하게 되었다. 이듬해 봄(B.C.491)에 다시 페르시아 국왕은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에 사신을 파견하여 "흙과 물"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투항하여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가장 큰 두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완강히 저항하였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의 사신을 산 위로 끌고 올라가 깊은 못에다 내던졌고, 스파르타인들은 사신을 우물로 끌고가 우물 속을 가리키며 '이 안에 흙도 있고 물도 있으니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하면서 우물 속으로 수장시켰다. 이에 격노한 페르시아 왕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장군을 시켜 대군을 거느리고 제2차 그리스 원정에 나서게 하였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강대한 함대는 아테네 성에서 동북으로 60Km 떨어진 마라톤(Marathon) 평원에 상륙하였다. 아테네인 들은 즉시 달리기를 잘하는 필립피데스(Philippides)를 우방인 스파르타에 파견하여 원조를 칭하였다. 필립피데스는 놀라운 속도로 이틀 동안 150리를 달려 스파르타에 이르렀는데, 뜻밖에도 스파르타 통치자는 자신들의 풍속인 '달이 둥글어지기 전에는 출전할 수 없다며 달이 둥글어지면 도와주는 구실로 출전(出戰)을 거부하였다 .사실 그들은 출전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장령들은 즉시 전체 공민들, 노예들까지도 군대에 편입시켜서 유명한 총사령관 밀티아데스(Miltiades, B.C.540?∼489)의 인솔로 마라톤 평원에 나아가 페르시아 군대와 결전을 벌였다. 아테네 군대는 불과 1만 명밖에 안 되었지만 페르시아 군대는 10만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가 승리를 거두었다. 밀티아데스는 승리의 소식을 아테네인 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다시 필립피데스르 찾았다. 그는 부상한 몸이었지만 즐겁게 그 임무를 맡아 나섰다. 그는 마라톤 평원으로부터 아테네 중심광장까지 달려가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모두들 마음놓으시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그리스는 페르시아 제국에 예속되지 않았고 또한 그리스 반도의 경제, 문화가 번영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영웅 필립피데스의 공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된 제 1회 근대 올림픽 대회의 한 종목으로 마라톤 경기를 채택하였다.

올림픽 봉화주자 선수는 마라톤평원에서 출발하여 그 당시 필립피데스가 뛰었던 그 길을 따라 아테네에 도착하게 하였는데 그 길이가 40.2Km였다. 현재의 마라톤 거리로 이용되고 있는 42.195Km가 정착되기까지의 기원전 490년변화과정은 다음과 같다. 마라톤은 1896년 근대 올림픽 제 1회 대회 때 채택되었으나 처음 거리는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까지의 거리로서 36.75Km였다. 그 후 제 7회 대회까지는 통일된 거리가 40Km 전후를 달렸다. 1924년 제 8회 파리대회 직전인 1920년 제 4회 런던대회(1980년) 때의 코스인 윈저 궁전으로부터 올림픽 스타디움까지의 거리 42.195Km를 측정하여 이 거리를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거리를 정식으로 적용하기 시작한 대회는 1924년 제 8회 파리대회 때부터이다. 육상경기의 꽃으로 지칭되는 마라톤은 그동안 배출해낸 무수한 마라토너들과 숱한 에피소드로 인해 육상에서도 독특한 장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마라톤을 금기로 여기고 있는 국가가 있는데, 바로 이란이다. 이란은 마라톤의 근원이 되는 마라톤 전쟁에서 패배했던 페르시아의 후예이기 때문에 당연히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4년 테헤란엣 아시안게임이 열렸을때도 마라톤 종목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었다. 고독한 레이스 42.195km, 마라톤은 인간의 체력한계라고 여기지는 거리를 최장시간 달리는 도로경주이다. 일반적으로 마라톤이라고 할때는 풀코스(정규코스)를 말하지만, 거리를 단축하여 10km, 20km를 뛰는 것은 단축 마라톤이라고 한다. 마라톤 레이스는 코스를 이탈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자력으로 완주해야한다는 두가지 원칙아래에서 이루어지며, 공식코스를 벗어나 지름길을 택하는 등의 행위는 실격처리된다. 또한 레이스 도중 타인의 도움을 받게되면 이 또한 실격처리 되므로, 마라톤은 엄청난 체력소모를 요하는 경기인만큼 선수는 경기 이전에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하며 경기도중이라도 공식 의무원의 중지명령을 받았을 때는 즉시 경기를 중단해야 한다.

한국 마라톤의 역사

한국 마라톤의 역사는 약 74년이다. 마라톤 첫 공식 기록은 1927년 조선신궁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마봉주가 세운 3시간 29분 37초이며 현재는 이봉주의 2시간 07분 44초로 단축이 되었다. 한국인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1932년에 개최된 LA 올림픽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으로 권태하선수와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은배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권태하, 김은배는 각각 9위와 6위를 차지했다.

그럼,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아마 마라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마라톤을 모르는 이라도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손기정선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국 마라톤의 역사손기정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한국 최고기록 및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월계관을 쓰게된다.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 그 한을 가슴에 안고 달려, 만천하에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면서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한민족의 한을 풀어주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당당히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서윤복 선수가 우승을 했다. 처음 태극기를 달고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탓인지 서윤복도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1950년 같은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 2, 3,위를 휩쓸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 마라톤이 기록 경신의 맥을 다시 이은 것은 1957년 열린 보스턴대회에서다. 한국 대표로 참가했던 임종우선수가 2시간 24분 55초라는 기록을 작성했던 것, 손기정이 세운 기록을 35년 만에 깬 것이다. 그 뒤 이창훈 선수가 1958년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최고기록을 48초 앞당기면서 우승을 했다. 아울러 그는 1959년 9.28 수복을 기념해 열렸던 인천∼서울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4분 07초로 연거푸 신기록을 작성했으며 20분 벽을 깬 주인공이기도 하다. 1962년부터 66년까지 5년 연속 최고 기록을 갈아치운 한국 마라톤은 이후 3년 간 기록행진이 주춤했으나 1969년 제 50회 전국체전에 박봉근 선수가 2시간 18분 18초의 기록을 세우면서 기록경쟁에 불을 붙였다.

한국 마라톤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84년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그 해 3월에 열린 동아대회에서 이흥렬 선수가 2시간 14분 59초를 기록하면서 아슬아슬하게 15분 벽을 허물었다. 이 벽을 허문 덕에 그는 5천만원이라는 거금의 상금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만큼 깨기 힘든 기록이었을 것이다. 15분의 벽이 허물어지자 뒤를 이어 1986년에 유재성이 2시간 14분 06초, 1987년 이종희 선수가 2시간 12분 21초로 12분대에 진입한 국내 최초의 마라토너가 되었다. 1990년대는 한국 마라톤이 아시아와 세계 무대를 석권한 황금기다. 90년 베이징에서 열림 아시안 게임에서 김원탁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고, 90년 동아 대회와 91년 한국 마라톤의 역사춘천 대회에서 김완기선수는 2시간 11분 34초와 2시간 11분 02초라는 신기록을 만들어 낸다. 같은 해 황영조는 91년 제 41회 뱃부∼오이타간 국제 대회에서 '숙원의 10분 벽'을 깨고 당당히 2시간 08분 47초라는 기록을 세운다. 황영조,이봉주선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을 겸해 열린 동아 대회에서 김재룡 선수와 김완기선수는 나란히 2시간 09분 30초와 31초를 마크 국내코스에서 처음으로 9분대 진입에 성공을 했고, 황영조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세계를 제패했다. 황영조 선수는 57년 만에 손기정 옹의 한을 풀어주면서 민족의 영웅으로 등극을 한다. 1994년에 두 차례의 한국 기록이 경신되었다. 김완기 선수가 동아대회에서 2시간 08분 34초를 세우자, 한 달 뒤 황영조 선수가 보스턴대회에서 2시간 08분 09초를 수립하고,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6년 황영조 선수가 은퇴한 뒤, 그 공백을 메울 스타가 태어났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준우승을 한 이봉주가 98년 로테르담대회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2시간 07분 44초로 한국신기록을 갱신하며 한국마라톤의 7분대를 열었다. 2000년 들어 이봉주는 동경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07분 20초로 다시 한번 한국신기록을 갱신하며 시드니 올림픽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한층 부풀어 올랐으나 레이스 도중 넘어져 24위에 그쳤다. 그렇지만 이봉주는 2000년 12월에 후쿠오카 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09분 43초로 우승하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연패 달성, 2003년 런던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8분대를 기록하며 한국마라톤의 간판스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한국마라톤은 이봉주를 선두로 지영준, 김이용 과 더불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바로셀로나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오늘도 쉬지않고 달리고 있다. 마라톤의 역사는 시간의 벽을 허무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사가 길면 길수록 완주 시간은 짧아질 것이다. 한국 마라톤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기록도 단축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라톤 강국이 아닌 마라톤을 사랑하는 나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마라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마라톤 역사는 빛이 바랠 것이므로, 이 다음 페이지를 장식할 영웅이 탄생되길 고대해 본다.